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범/선수 경력 (문단 편집) ==== 일본 진출, 시련의 시작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주니치 이종범.jpg|width=100%]]}}}|| [[http://npbstats.com/players/db/%ED%83%80%EC%9E%90/?wdt_search=104614|세이버 스탯을 포함한 이종범의 NPB 성적]] 일본에서의 데뷔 후 첫 달은 엄청난 맹활약을 펼치면서 일본 열도에 충격과 공포를 동시에 선사했다. 용병답지 않게 친화력이 상당히 좋았고 온 몸을 던지는 허슬플레이를 비롯한[* 특히 도루를 성공할 때마다 헬멧에 하나씩 붙이던 하얀 닌자스티커가 나름 컬트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호시노 센이치]] 감독도 매우 좋게 보았던 팀 분위기를 끌어올렸던 투쟁심 있는 모습, 당시 일본 야구관에 있어 유격수는 내야수비의 핵으로 타격은 약해도 팀에서 가장 뛰어난 수비수라는 인식이 주류였는데 시즌 초반부터 3할을 넘나드는 타격과 부상 전 기준으로 팀내 홈런 3위, 리그 10위 이내에 드는 생각 외로 뛰어난 장타력, 거기에 특유의 빠른 발로 도루부문 리그 1위를 질주하면서 주니치 팬들 뿐 아니라 모든 일본야구 팬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부상 전까지 당시 팀 실책의 절반 가까이였던 11실책을 기록, 압도적으로 리그 1위를 달리며 수비쪽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비력을 선보이면서 '유격수는 뛰어난 수비수'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공포도 동시에 안겨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첫째 이유는 이전의 주전 유격수 [[토리고에 유스케]]가 탈세사건에 연루되어[* 탈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토리고에 뿐만 아니라 고쿠보 히로키 등 몇몇 선수들이 연루된 사건이었다.] 출장 정지된 상태라[* 결국 토리고에는 복귀 후에도 이종범과 [[쿠지 테루요시]]에게 밀려 출장 기회를 잡지 못했고, 끝내 1999년 시즌 도중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후 다이에에서 주전 유격수였던 [[이구치 타다히토]]의 부상으로 다시 기회를 잡아 2003년까지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다 [[카와사키 무네노리]]에게 밀려나며 2006년 은퇴했다. 은퇴 후 다이에의 후신인 소프트뱅크 코치를 거쳐 현재는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감독을 역임하고 있다.] 이종범을 대체할 유격수가 없었고,[* 당시 2루수였던 [[타츠나미 카즈요시]]를 [[좌익수]]로 옮기고, 2루 자리에 [[쿠지 테루요시]]를 기용한 상태였다.] 둘째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시즌 초의 타격지표가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상위리그로 진출하는 타자들은 타격성적이 첫 해에는 급락하기 마련인데, 리그가 바뀌고 친 투수구장인 [[나고야 돔]]을 홈으로 쓰면서도 팀내 모든 부분에서 상위권을 다툴 정도로 공격력이 좋았기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반증하듯 부상 전 올스타전 투표에서도 유격수 부문 1위를 기록했는데, 2위와 두 배 이상 차이나는 득표를 받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일본식 분석야구'에 공략당하면서 약점이 잡히며,[* 4월 0.337 2홈런 14타점 10도루, 5월 0.260 5홈런 10타점 5도루, 6월 0.235 2홈런 4타점 2도루. 5월까지는 장타력을 바탕으로 구단 선정 월간 MVP에도 올랐으나, 6월에 들어서는 요미우리전 전까지 사실상 안타를 거의 치지 못했을 정도로 공략을 당했다. 다만 이는 단순히 월별로 끊었을 때 이야기이고, 전체적인 추이를 보았을 때는 6월 초에 잠시 부진이 있었고, 6월 중순부터 2개의 홈런을 포함한 7경기 연속 안타를 치며 슬럼프에서 벗어나 반등하고 있었다.] 6월 초 들어 잠시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던 이종범은 6월 중순에 타격감을 조금씩 회복해가며 부상 직전인 22일까지 두 개의 홈런을 포함한 7게임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감을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http://news.imaeil.com/page/view/1998062214040250200?ismobile=true|특히 부상 직전 경기에서도 멀티히트를 기록하고,]] 올스타전 중간 투표에서도 센트럴리그 유격수 부분 1위를 차지하며 반등의 여름을 기대하게 만들었으나 1998년 6월 24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 '''카와지리 테츠로'''[* 1990년대 중반 [[한신 타이거스]]의 주축 [[선발 투수]]로 활약한 선수로, 이 해 5월 26일에 [[주니치 드래곤즈]]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바 있다. 이때 같이 배터리를 짠 [[포수]]가 전년도까지 주니치에서 뛰었던 [[야노 아키히로]]. 현역 말년엔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를 거쳐 신생팀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창단 멤버로 2005년 한 시즌을 뛴 후에 은퇴했다.] 투수의 몸쪽 공을 무리하게 스윙하려다 오른쪽 팔꿈치에 투구를 맞아 골절상을 당하게 된다.[* 이는 당시 주니치 수석코치였던 '''시마노 이쿠오'''의 작전으로, 경기 전 주전 선수 전원에게 카와지리의 몸쪽 코너웍을 어렵게 하기 위해 타석에서 스트라이크 존에 바짝 붙어서 치도록 주문했다고 한다. 이후 시마노는 그 작전을 낸 것을 후회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https://column.sp.baseball.findfriends.jp/?pid=column_detail&id=097-20211117-12&fbclid=IwAR2J8yiw-cmtHfqz7Cv4RyFhG4m-bJVbqZX7vB1IUGan5EEpmYRa1KUCktE|링크]]] 이로 인해 남은 시즌을 거의 날리고 시즌 막바지에야 가까스로 복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부상 이후 다시는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KIA에 복귀해서 준수한 외야수의 모습을 모여줬지만 압도적인 해태의 유격수 이종범의 모습은 여기서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50223010023048001501912.jpg|width=100%]]}}}|| 1998년 시즌 최종성적은 '''67게임에 출전해 .283 10홈런 18도루 OPS .873 WAR 3.2'''을 기록했다. 겉으로 보기엔 용병으로서 무난한 성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파고들면 상당한 공격력을 자랑한 시즌이었다. 당장 팀의 주전 중에 타율이 이종범보다 나은 선수는 부상 직전에는 '''이노우에 카즈키''', 부상 후에는 .285를 기록한 [[세키카와 코이치]]밖에 없었으며, 홈런 수 역시 잠시 슬럼프에 빠지기 전인 6월 2일 기준 [[http://2689web.com/1998/DS/DS9.html|팀내 홈런 1위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부상 직전 6월 21일 기준으로도, 11개의 홈런을 기록한 '''레오 고메스'''에 이어 [[야마사키 타케시]]와 함께 9개로 팀내 홈런 공동 2위를 기록, 광활한 [[나고야 돔]]을 홈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드오프가 리그 10위 이내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 위로는 [[마츠이 히데키]](요미우리=14개), [[마에다 토모노리]](히로시마=12개), '''레오 고메스'''-[[타니시게 모토노부]](요코하마)-[[에토 아키라]](히로시마)가 11개, [[키요하라 카즈히로]](요미우리)-[[이케야마 타카히로]](야쿠르트)가 10개로 상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시즌 종료 시점에서도 [[야마사키 타케시]]의 27개, '''레오 고메스''' 26개에 이은 팀내 3위를 기록. 도루는 67경기만 뛰었음에도 98년도 [[센트럴리그]] 도루 부문 2위[* 이 해 [[센트럴리그]] 도루왕은 [[이시이 타쿠로]]가 39개로 수상했다. 이후 이시이는 2000년까지 3년 연속 도루왕을 수상하게 된다.]를 기록했으며, 부상당한 시점에서는 17개로 리그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루사를 10개나 기록할정도로 성공률은 좋지 못했다.] 1번타자의 최고의 덕목인 볼넷과 출루율도 부상 직전까지 각각 센트럴리그 3위, 5위를 기록하면서 공격면에서는 확실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더욱이 세이버스탯으로 들어가면 1번타자 유격수임에도 타자의 생산력을 나타내는 wRC+가 140을 넘겼으며, 기타 세부 성적도 wOBA .390, BB/K 1.09. WAA 2.2 등을 기록. 매우 좋은 타격 성적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타격 성적 때문에 이후 99년에도 호시노가 외야수로까지 컨버전시키면서, 시즌 내내 2할 5푼대를 전전하다 시즌 종료 시점에서 .238를 기록한 최악의 타격부진 속에서도 400타석 넘게 출전시킬 정도로 이종범에게 미련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1999년에는 1998년 팔꿈치 골절 후 시즌 막판에 컴백하면서부터 외야수로 보직을 변경한 것이 이어져 외야수로 기용되어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범경기에서만 4개의 데드볼을 맞으며 불안한 출발을 보이더니, 정규시즌에 들어서는 시즌 내내 .250대의 타율을 기록하다 막판에 성적이 떨어지면서 결국 시즌 종료 시점에서 '''타율 .238/OPS .683 9홈런 33도루 24도루 WAR 0.6'''이라는 기록으로 리그 2위를 기록한 도루 부분[* 앞의 각주에서 상술했듯이 이 해 센트럴리그 도루왕도 [[이시이 타쿠로]]. 전년도와 동일한 39도루로 수상했다.]을 제외하면 팀내 타격 성적에선 리그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주전 [[포수]] [[나카무라 타케시]][* '''타율 .200'''/OPS .527 6홈런 42타점. 안타를 하나라도 덜 쳤으면 1982년 요미우리의 [[야마쿠라 카즈히로]] 이래 17년만의 '''규정타석 1할타자'''가 될 뻔했다.] 다음 정도의 부진한 성적에 그쳤다. 실책까지 7개를 기록하면서 외야 수비 또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원형탈모까지 생기게 되었다. [[https://youtu.be/y3wXAow8axM|관련 영상]]] 다만, 일단 출루하면 특유의 몸을 내던지는 슬라이딩과 일본에서도 인정받은 빠른 발을 이용한 주루플레이로 상대를 뒤흔드는 모습이 종종 나왔고, 이를 나타내듯 도루 성공율이 .774, Spd가 7.2를 마크하며 당시 주루 플레이에서만큼은 리그에서 손 꼽히는 활약을 펼쳤다. 또한 99년 [[한일 슈퍼게임]]에서 [[조성민]], [[선동열]]과 함께 일본 올스타 대표로 출전, 총 5타수 2안타를 기록했으며, 1회전에서 한국 대표팀을 상대로 홈런을(상대투수:구대성) 쳐내기도 했다. 2000년에는 전년도 시즌에서의 부진과 비시즌간 호시노 감독과의 마찰로 인해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하고 2군에서 시즌을 시작. 새 용병 데이비드 닐슨(등록명 딩고)이 시즌 초반 극악의 부진을 보였고, 팀도 연패에 빠지는 등 어수선하자, 2군에서 [[본즈 놀이]]를 하고 있던 차에 바로 1군으로 콜업되어 마치 98년 전반기 모습같은 활약으로 팀이 10연승을 질주하는 데 기여했다. 호시노 감독도 이 때 만큼은 "팀 분위기를 바꿔줄 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는 말로 이종범의 활약을 인정했을 정도. 연승이 끝난 이후 잠시 주춤할 때도 있었으나 8월 중순까지 주로 1,2,3,6번을 오가며 3할을 넘나드는 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분전했고,[* 주로 1,2번으로 기용되었지만 당시 주니치는 클린업을 제외하면 타선이 고정된 선수가 없었기에, 그에 맞춰 간간히 타순을 옮길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는 야마사키, 타츠나미, 고메즈, 이종범, 세키가와 뿐이었다.] 외야 수비 역시 시즌 동안 실책 3개로 전년에 비해서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시즌 말미에는 호시노에게 좌익 수비는 리그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호평을 듣기도 했다.[* 다만 이 때도 송구의 정확도가 떨어졌다는 평이 있었다.] 최종 성적은 '''113경기에 출전해 .275의 타율과 8홈런 37타점 11도루. WAR 2.3'''를 기록했다. 9월 들어서 막판에 힘이 빠진 탓에 타율이 여름에 비해 뚝 떨어졌으나, 전년도에 바닥을 찍었던 타격 성적보단 어느정도 일본 리그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2000년 이종범의 성적은 타율만 보면 전년도에 비해 괜찮아 진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단정짓기는 힘들다. 전년도에 리그 하위권이었던 타율은 리그 전체 19위로 올라섰지만 리드오프 외국인 선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특별히 좋다라 판단하긴 힘들었고, 출루율이나 장타율도 썩 좋다고 보기 어려운 편이었다. 장기인 주루플레이에서도 그린라이트를 완전히 뺏겼다지만 8개의 도루사를 기록하며 성공률이 57.8%로 폭락했다. 다만 주루의 경우 2000년 당시 작성된 글과 기사를 보았을 때, 6월까지는 작년에 이어 이미 두 자릿수 도루를 성공하고, 도루 성공률 9할을 기록하며 쾌조의 주루능력을 보였으나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체력적 문제로 인해 그린라이트를 뺏기고 도루수가 급감하며 그만큼 주루사가 늘게 된 것으로 보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3933761#home|#]][[https://m.cafe.daum.net/BMC/3pA/13?listURI=%2FBMC%2F3pA|##]]] 2001시즌은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긴 했지만 새 용병 듀오인 팀 언로와 아지 티몬스에 밀려 시범경기부터 선발 출전하지 못하고 대타와 대수비 등으로만 출전했다. 출장 기회를 확보하고자 외야수는 물론, 고등학교 1학년 이후 처음으로 3루수 준비까지 했던 이종범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개막 얼마 후 2군행 통보를 받고 분노가 폭발해 급기야 구단 대표와 담판을 지어 출전 기회가 보장되지 않으면 퇴단하겠다고 통보했다. 4월 24일 야쿠르트전부터 다시 1군에 복귀해 선발 3번타자 3루수로 기용되었으나, 이틀 연속으로 출루 한번 못하고 8타수 무안타를 기록해 다시 벤치멤버로 내려갔다. 이후 두 경기에서 대타, 한 경기에서 대주자로 기용된 후 다시 2군으로 강등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전 시즌까지 주니치의 붙박이 4번타자였던 용병 레오 고메스가 주니치와의 뒤늦은 재계약에 성공해 컴백하게 되자 더 이상 1군에서 이종범이 설 자리는 없었다.[* 투수쪽은 지난시즌 다승왕과 구원왕인 번치와 게일러드가 붙박이였고, 고메스의 가세로 남은 2개의 용병 엔트리를 놓고 용병 넷이서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6월 1일자로 상호 합의하에 주니치를 퇴단하였다. 일본 진출 후 20여년이 지난 후 새삼 주니치 팬덤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2018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과 [[2019 WBSC 프리미어 12]]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좋은 성적을 올린 [[이정후]]가 이종범의 아들인데다, 2018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주니치의 역대급 마무리였던 [[선동열]]과 함께 코칭스태프로 다시 한번 페어를 이루었고, 19년엔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이 2000년 주니치에서 이종범과 한솥밥을 먹었던 데이비드 닐슨이었기 때문. 거기에 2019년 11월 이종범이 주니치로 코치연수를 가게 되면서 올드 팬들에게 계속해서 언급되기도 했다. 이종범이 주니치에서 뛰던 당시 리그 우승도 한데다 데뷔 첫 해의 강렬한 임팩트도 있었고, 여타 용병들과 달리 몸을 던지는 허슬플레이 덕인지 올드 주니치팬들에겐 실패했다는 이미지보다는 고메즈, 선동열, 이상훈과 함께[* 대체로 코리안 삼총사로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편이다.] 90년대의 추억의 용병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하다. [[https://gall.dcinside.com/tigers_new/5508071|#]][[https://gall.dcinside.com/tigers_new/5524356|##]][[https://gall.dcinside.com/tigers_new/5533633|###]][[https://gall.dcinside.com/tigers_new/9366084|21년의 유튜브 댓글]][[https://column.sp.baseball.findfriends.jp/?pid=column_detail&id=097-20211117-12&fbclid=IwAR2J8yiw-cmtHfqz7Cv4RyFhG4m-bJVbqZX7vB1IUGan5EEpmYRa1KUCktE|이종범을 추억하는 21년의 기사]] 여담으로 [[SK 와이번스]]의 일본인 투수 [[카도쿠라 켄]]과는 주니치 시절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인연으로 카도쿠라가 원정 경기가 끝난 뒤에 이종범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다.[* 다만 이종범이 퇴단할 당시 카도쿠라는 킨테츠로 이적한 상태였으며 그해 킨테츠의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다. 그리고 카도쿠라는 2007년에 요미우리로 이적하면서 [[이승엽]]과도 팀메이트로 뛰게 된다.] 그리고 2020년 이종범이 주니치로 코치연수를 가게되면서 마침 2군에서 투수코치를 맡고있던 카도쿠라와 잠깐이지만 다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